[2강의]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계획 :  인간과 사회

 

교회의 사회교리 (La dottrina sociale della Chiesa) [주1]

교회의 사회교리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마르티노 (Renato Raffaele Martino) 추기경님께서는 “교회의 사회교리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복음의 빛과 열기는 인류 사회[주2] 비춥니다.... 사랑이 공동으로 하는 체계적인 봉사가 되려면 조직화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사랑을 보면 삼위일체를 보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의 자선[3] 단체들은 일반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만 하기에 사회교리에서 하는 까리타스[4] 라는 개념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지혜롭게 조직화된 기구들을 만들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인간의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마르티노 추기경님의 말씀은 이미 알려진 대로 쿠엔 투앙 추기경님[5] 더불어 사회교리를 책으로 발간하는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Giovanni Paolo II) 교회의 사회교리에 대해 말씀하시며 "새로운 복음화[6], 사회적인 복음"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자선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니 이것이야 말로 자선의 시작입니다. 사회적인 자선, 정치적인 자선은 복음을 기초로 하여 복음이 인간 활동 노동, 경제, 정치 안으로 들어가 평화를 건설하고 정의를 건설하고 민족들 사이의 친교를 건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성덕, 사회적 성덕입니다. 라고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들은 세상에 복음이야말로 지속적으로 풍요로운 결실을 보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들입니다. 라고 2004년도에 담화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네딕토 16 교황님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회칙[7]에서 기본적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거룩한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무는 역동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고 인간은 모든 사회를 보여드리며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이 체계화된 자선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앞에서 까리타스처럼 여정이 우리가 해야 일입니다.

사회교리 안에는 철학과 신학이 포함되어 있고 사회과학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을 구체적으로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사회교리 안에서의 신학적 차원 (La ‘dimensione teologica’ della dottrina sociale della Chiesa)

사회교리의 “신학적 차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요한 바오로 2 교황님께서는 인간에 대해 혹은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항상 신학적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러한 신학적 차원은 인간 공동체의 현대문제들을 이해하며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베네딕토 16 교황님은 신앙[8] 빛을 발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마음”을 지니도록 한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보는 마음”은 사랑이 필요한 곳을 알게 하고 바로 그곳에서 활동한다고 하셨습니다.

베네딕토 16 교황님은 또한 “신앙은 고유한 본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만남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개성 자체를 정화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견지에서 신앙은 이성을 맹점에서 해방시켜 자체로 완전해 지도록 도와줍니다. 신앙을 더욱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고유한 목적을 더욱 명확히 있게 합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바로 이러한 자리에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정화하는 힘”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정의를 통해 나타나며 우리 생활의 모든 , 정치, 경제, 문화 사회에서도 그렇게 해야 함을 뜻합니다.

베네딕토 16 교황님에게 있어서 “교회는 이성의 정화에 이바지해야 하고 도덕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이런 힘이 없으면 정의로운 체제가 이루어 수도 없고 오래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사회교리는 계시를 통하여 인간의 공동생활이 지닌 여러 가치들을 비추어 어두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열려있으면서 살아있는 도구가 되어 가치들이 모든 역사의 구석구석에 비춰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간추린 사회교리의 번째 부분인 교회의 사회교리의 전제조건 관하여 공부하고자 하는데, 내용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 해당되는 것으로써 간추린 사회교리 20-59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1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계획 (IL DISEGNO DI AMORE DI DIO PER L’UMANITA’)

1-1.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느님의 해방 활동 (ㅣ’agire LIBERANTE DI DIO NELLA STORIA DI ISRAELE)

종교들의 역할 하느님의 신비 (Il ruolo delle religioni – Il mistero di Dio)

간추린 사회교리20항에서 보면 하느님의 무상 현존에 대한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문화 전통에서, 모든 진정한 종교적 체험은 흔히 하느님의 모습의 일부 측면을 인식할 있는 신비를 직관할 있게 합니다. 라는 말씀이야말로 교회 생활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주년 회칙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어느 보다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의 해결이 경제적 생산이나 법률적, 사회적 조직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마음과 행동과 구조들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사실 나는 종교들이 오늘과 내일의 평화를 유지하고 인간들의 사회에 합당한 현실을 건설하기 위한 역할을 하리라고 확신합니다.

탁월한 많은 종교들이 공통된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것으로서 모든 존재의 기본 당위의 잣대로서 근본적으로 나타나시고 현존하십니다.

최근 인도 뭄바이 (Mumbai, 이름은 Bombay)에서 힌두교와 그리스도인과의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신비[9] 설명한 파비오 (Fabio Ciardi) 신부님의 말씀을 인용하려 합니다. "신비 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Mistero)에서 나온 것으로 <눈을 감다> 뜻입니다. <눈을 감는다> 속에는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을 신비라고 합니다. 인간이 당신 사랑의 계획에 참여하길 원하시며 또한 하느님은 인간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정신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에로 열려있어야 하며 하느님께서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어 역사를 하느님께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어떤 종교에 속해있건 하느님의 신비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성숙한 완성도로 이루게 되는데 이는 다른 종교인들을 자극하여 각자가 봉헌을 하도록 합니다. “새로운 인류를 형성하기 위해 각자 자신의 경험을 내어놓을 있으며 자신의 경험으로 기여할 있습니다. 이는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끼아라 (Chiara Lubich)께서는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보편적인 형제애를 부분적으로 이룰 있다고, 이탈리아의 아씨시 (Assisi)에서 모든 종교인들과 교회가 2002 1 모임을 가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은총과 무상성 (Dono e gratuita’)

“모든 신비적 체험에서는 인간이 세상에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며 겪는 체험의 밑바탕이 되는 요소로 여겨지는 은총[10] 무상성 (無償性) 차원에 중요성을 부여한다. 무상성이란 아무 조건 없이 자유롭게 행하며 아주 풍부한 관대함을 말합니다. 아울러 그러한 차원이 인간의 양심에 미치는 영향에도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그리하며 인간의 양심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책임감 있게 관리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느낀다“ 라는 신비의 체험은 은총과 무상성으로써 구체적인 표현으로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87년도 담화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무상성에 대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간헐적으로 비추어 줍니다.

예를 들면 탄생이나 자연 앞에서 경이롭게 나타날 있고, 죽음의 고통 앞에서 의문을 가질 때에, 인간이 지닌 감정들, 파괴적이고 또한 건설적이기도 그런 앞에서도 나타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속적으로 빛을 주는 것이 아니고 간헐적으로 비추기에 효과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은총과 무상성의 다른 효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는 은총과 무상성은 있을 수가 없으니 무언가를 주면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 내면에는 은총으로 불리는 사랑이 우리를 밀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는 문화 (Cultura del Dare)’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이 증가하는 것은 결국 창조주께서 인간본성 자체에 이웃사랑의 계명을 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리스도적이며 교회적인 사랑의 근본요소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일반적으로는 주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나 하느님께서 주신 본성에는 어긋납니다. 그러기에 인간 내면에는 상대방에게 무상으로 주려는 마음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본성입니다.

베네딕토 16세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회칙에서 보면 보편적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지로 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즉시로 하나의 욕구에 충족시켜야 하므로 전문적인 역량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번째는 정확하게 보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번째는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무상으로 주는 마음,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선사업에 구체적으로 해야 하나 근본바탕에는 하나의 영성이 깔려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황금률 (La regola d’oro)

<보편적인 윤리, 황금률> 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황금률[11] 여러 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종교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다양한 백성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서 황금률을 표현하고 있다. 다른 어떤 관습보다도 황금률이 먼저 보이는데 이는 옳은 일이다.> 라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는데 이는 어떤 관습보다도 보편적인 윤리이다. 황금률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관습을 말해주는 일뿐 아니라 어떤 관습에 속한 문화이건 간에 모두 받아드릴 있는 내용이 안에 들어 있다. 세상에 있는 누구도 모두 받아드릴 있는 내용이다. ‘기본 원리’ 라고 있으며 <스스로의 영신적인 빛의 정점이다> 라고 있다. 영신적인 빛을 통해 인간이 하고 있는 모든 활동을 비추는 정점이라고 있다. 물론 빛에 대해 누군가는 받아드리지 않고 반항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며, 모든 이들이 이를 알고 있다.

서문에는 예수님 이전 시대에, ‘황금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관해서 언급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사라투스트라 (Zarathustra)[12] 라는 페루시아인은 “각자에게 그리고 모든 이에게 유용한 것은 나에게도 유용한 것이다. 어떤 하나의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이에게도 선한 것이다. 어떤 법률이 있는데 그것이 모든 이에게 가치 있는 것이라면 모든 법에 통용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 있습니다.

<마바라타> 라는 인도인은 “너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나에게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남에게도 주어라.’라는 말씀에 모든 법률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이 오시기 200 전에 이미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 라고 했고, 1세기 히브리서에도 ‘다른 사람이 너에게 행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 께서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대표자들에게 하신 당신의 유명한 연설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13]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도 그들 종교 안에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롭게 살고, 용서하고, 자비심을 가져야 합니다. 대부분 종교들이 피조물에 대해 애착심을 갖지 않고 피조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 기도나 묵상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므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황금률’을 가르치시면서 ‘남이 너희에게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주어라. (루카6,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황금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것이야말로 평화를 이루는 근본이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란 이런 가치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가치는 정의, 진리, 자유, 사랑이라는 가치 위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런 가치를 향해 나아갈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진정한 평화가 오고 그것이 평화를 지키게 것입니다. 라고.

“보편적인 윤리, 황금률” 이라는 책에서 서평을 쓰신 토마스 타트란스키 (Tomas Tatransky)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면 ‘황금률’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지속적으로 내려오고 있음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의 세계와 그리스 문화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님과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율법’, ‘형제에 대한 사랑’, ‘황금률’등, 가지에는 동등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로운 요소들을 가져오셨는데 그의 황금률에는 하지 마십시오.’가 아니라 하십시오. 라는 긍정적인 면을 제시하십니다. 율법과 예언서[14] 에서도 ‘사랑 안에서 하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가지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이에게 존경심을 표한 것이기에 넓은 것입니다. 이전의 황금률은 ‘너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한 가지 더’ 말씀하십니다. , 계명을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라는 상호성은 예수님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있었으나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은 없었습니다.”라고.

<토마스 타트란스키> 계속해서 말하기를, 유럽에 있는 모든 문화 (파스칼, Pascal로부터 마리언, Jean Luc Marion 다른 이에게 이르기까지),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다른 문화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이같이 서평을 끝맺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며, 그것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만 하느님께서도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것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황금률’이 형성된다. ‘황금률’을 말할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수평으로만 생각할 가끔 우리는 혼란을 겪을 있다. < 내가 모든 사람을 항상 사랑해야만 하는가?> 라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생각하면 유혹은 해결된다. 라고.

 


a)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본 하느님의 무상현존 (Prossimita’ gratuita di Dio nella storia di Isrele)

1 전체는 하느님의 무상행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이란 <하느님은 사랑> 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번이 아니라 조금씩 단계적으로 하느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때그때 어떻게 하셨는지 역사로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까지 어떻게 사랑이 완성되었는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심을, 행하심을 보면 인간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교회가 가지는 소명이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항상 하느님을 추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단계적으로 자신을 계시(啓示)[15] 하십니다. 사랑의 무상행위로 자신을 조금씩 나타내 보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약속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어 하느님의 백성을 형성하십니다. 그리고 가지를 선물하시는데 자유와 땅입니다.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은 자유를 주신 것이고 그들에게 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라찡거 추기경님> ( 베네딕토 16 교황님의 이름)께서는 사회교리 21[16] 언급된 탈출기 이야기 안에서 우리가 가지 측면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약속된 땅으로 인도되는 것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확실하고 안전한 땅에 도달해서야 그들이 자유롭다는 것을 느낄 있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이집트 파라오에게 ‘내 백성이 광야에서 나를 예배하게 보내라.(탈출7,16)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긴 했지만 다른 민족처럼 되기 위해서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떠났고 하느님은 그들에게 땅을 주셨는데 이는 (거기)에서 하느님께 봉사할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계약과 십계명()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계약을 맺으십니다. 탈출기 (출애굽기) 읽어보면 십계명뿐만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지켜야 모든 율법이 적혀 있습니다. ‘예배 율법 윤리성’, 가지가 서로 견고하게 짜여 있습니다.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 가게 되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적인 삶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계명에 따라 생활해야만 약속된 땅에서 생활할 있다고 하셨습니다. 계명에 따라 살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물질을 우선하여 산다든지 하면 내적인 자유를 잃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율법 안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정의에 따라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찡거 추기경님 말씀입니다. 윤리적인 삶은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에 대해 드리는 응답입니다.

 


자연윤리법
(Legge morale naturale)

인간은 누군가가 ‘이렇게 살아라’ 해서가 아니라 내적으로 이미 형성된 따라 살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자연성을 탁월하게 표현합니다. 요한 바오로 2 교황님께서도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된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국법도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베네딕도 16 교황님께서는, “자연윤리법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법이라든지 사회법을 따라 살면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됩니다. 내가 가진 권리가 무엇이며 의무는 무엇인가?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법입니다. 사회적으로 가질 있는 모든 법률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자연 윤리법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는 ‘진리의 광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존재에 침해할 없는 존엄성을 보호함으로써 윤리규범은 인간사회 조직을 보존하고 그의 바르고 풍요로운 발전을 계속하도록 도와줍니다” 라고.

 


가난한
이들의 권리 (Diritto del povero)

계약의 백성들이 분이신 하느님께 충실하고 그들이 서로 사회관계에 충실하여야 의무는 십계명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관계는 이른바 가난한 이들의 권리로써 규제됩니다.

“너희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된다. 오히려 너희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꾸어 주어야 한다. (신명기 15,7-8) 모든 것은 이방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너희 땅에서 이방인이 너희와 함께 머무를 경우 그를 억압해서는 된다.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다. (레위기19,33-34)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무상의 행위와 정의로운 나눔의 방식을 나타내는 규범들 가운데 희년 (禧年)[17] 법과 안식년 (安息年)[18] 법이 나오는데 법은 이스라엘 민족의 사회경제생활을 위한 중요한 지침들입니다. 규정들은 땅을 묵혀 두기를 요구할 뿐만 아니고 빚을 탕감해 주고 사람과 재화를 놓아주기를,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상속받은 재산을 되찾을 있게 주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법을 제정한 것은 구원을 가져다 이집트 탈출사건과 계약에 대한 충실성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기본 원리이며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불의를 다루는 기본 원리입니다.[19] 안식년과 희년의 규정은 일종의 축소된 사회교리입니다.[20] 이렇게 생활한다면 하느님께 충실하게 된다고 말할 있습니다.


b)
 창조원리와 하느님의 무상행위 (Principio della creazione e agire di Dio)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주시어 자유를 주셨고 땅을 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를 통해 하느님은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 근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순간이 아주 특별한 순간으로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신비를 행위를 통해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척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다> 라는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은, 단지 이론적인 확신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베풀어 주시는 자비로운 행위가 본래 어느 정도였는지를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만물에게 본성과 생명을 거저 베풀어 주십니다.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재화를 돌보도록 데려다 놓으신 그 정원에서 하느님의 무상행위를 보여주는 표지이자 효과적인 도구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21] 창조주와 인간과 모든 창조물이 서로 얽혀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죄로써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느님께 불복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모습을 등지고 세상에 자신의 생활과 활동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친교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일치도, 남녀의 친교도,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조화도 모두 다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사회에서 인간 관계를 악화시키는 모든 악과 경제 정치 생활에서 인간존엄을 침해하며 정의와 연대를 해치는 모든 상황의 근본 원인은 바로 이러한 태초의 불화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22]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13항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고 하느님을 떠나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지만 찬양하지 않았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 창조주 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을 섬겼다. 하느님의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 사실은 바로 우리 경험과 일치한다. 인간이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선하신 자기 창조주에게서는 올 수 없는 악에 기울어져있고 수많은 죄악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흔히 하느님을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궁극목적을 지향하는 당연한 질서마저 무너뜨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를 깨뜨려 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은 개인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참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극적인 투쟁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악의 유혹을 효과적으로 이겨낼 수 없음을 깨닫고 또 누구든지 저마다 사슬에 묶여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인간을 해방하시고 그 힘을 북돋아주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오시어 인간을 내적으로 새롭게 하시고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 묶어 두었던 이 세상의 통치자를 밖으로 쫓아내셨다. 죄는 인간을 위축시켜 완성을 추구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인간들이 체험하는 드높은 소명과 깊은 불행은 바로 이 계시의 빛 속에서 그 궁극이유를 발견한다.” 라고.

 

 

2장 성부의 사랑의 계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GESU’ CRISTO COMPIMENTO DEL DISEGNO DI AMORE DEL PADRE)

a)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역사의 결정적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달성된다

 

육화되신 성자 예수님, 하느님의 인간과 함께 사신 역사에서 결정적인 모든 일들이 안에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인간에 아주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 중의 사람이 정도로 그렇게 가까이 오셨습니다.[23]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계셨는데 성부께서 가지고 계신 자비가 무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움직이게 것입니다.

루카4,18-19(에서) 보면, “주님의 영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은총의 해가 희년입니다. 빚을 탕감하고, 회복되고, 용서받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그분처럼 살도록 부름 받았고 또한 그분께서 죽음에서 부활로 옮아가신 파스카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인간 마음 안에 새겨주시는 위로자이신 성령의 풍성한 은총을 받아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24]

 


b) 삼위일체적 사랑과 그 계시

예수님의 파스카 안에서 일어난 삼위일체적 사랑에 관한 완전한 계시는 사회교리 30-33항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베네딕도16 교황님께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회칙을 발표하시기 전에, 피에로 코다는 ‘예수님의 인간성에 비추어본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있습니다. "인간성은 유일한 것이고 그리고 사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인도주의 마음을 가지고 오늘날 살아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합니다." 라고.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은 어떻게 나타나는가요? 끼아라는 지역에 가게 되면 지역은 '이렇게 살라' 일러주십니다. 끼아라는 시대의 징표를 읽으며 구체적으로 지역에 대해 살아야 길을 제시하십니다. 끼아라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2 바티칸 공의회에서와 같이 시대의 징표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피에로 코다는 시대의 징표에 관해 이렇게 말한 있습니다. “한 인간이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면,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해야 하고 예수님의 복음의 빛을 읽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안에서 일어난 일은 결코 하느님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는 하나의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과 같아서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육화 강생으로 그분과 우리 사이에 하나의 막장을 형성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을 역사의 중심으로 옮겨가게 하신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의 마음 안에서 사시게 것이다. 인간은 진리를 찾고 정의를 찾는다. 라고.

예수님의 복음은 역사 안에 ‘인간이 인간으로 되어져야 모습,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역사 안에서 시대의 징표는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신데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징표 중에 가장 것은 하느님께서 육화하신 강생한 예수님입니다. 역사를 바라보게 되면 인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인간을 이해할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이시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공의회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공의회 문헌 중에서 <기쁨과 희망[25]>이란 헌장의 22항에도 이렇게 짧게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 인간 아담은 장차 오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예형이었다.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와 사랑의 신비를 알려주는 바로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고 인간에게 지고의 소명을 밝혀주신다. 라고.

지금까지 우리는 ‘아! 불쌍한 인간.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신학은 신앙 면에서 우리를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느님도 인간을 필요로 하시며 사랑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으로 보면서 예수님을 연구하고 인간에 대해 연구한다면,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이 생겨났지만 예수님께서도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데 우리는 죄인이기에 죄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단지 그런 의미에서 구원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강생 (육화)[26] 중요한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안으로 들어갈 있도록 우리에게 천국을 영원히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느님이 하신 경험을 우리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게 됩니다. 말은 요한도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생활에 우리 모두가 함께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삶이란 바로 성삼위의 삶입니다.

피에로 코다 성삼위의 사랑 (아가페, Agape)[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렇게 시작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속해서 참여하시고 새롭게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이 되는 테마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회교리가 계속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이레네오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살아있는 인간 자체입니다. 인간이라는 뜻은 ‘우리’ 라는 뜻이고 우리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계획입니다.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은 나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개인적으로 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안에 개별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함께 들어갈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피에로 코다께서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인류학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박히셨고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보면서 인간을 안에서 찾게 됩니다. 아름다운 인간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찬양을 하고 예배를 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느님의 걸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3장 하느님 사랑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인간의 기원과 목적인 삼위일체의 사랑

교회는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이러한 소명의 부분을 차지합니다. 마리아 사업회의 역사를 보면 운동의 초창기에 일치의 카리스마가 태어났을 즉시로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전쟁 중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치를 살고자 했고 일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편적인 형제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끼아라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음에 공유경제가 태어났고 모든 , 세계가 환호를 보냈습니다. 공유경제는 하나의 폭탄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카리스마는 신적이기도 하나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고통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기원에 대해 말하는데 인간 (persona)이란 단어는 철학에서 기원하며 인간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개별적이며, 존엄성을 지니고, 자유를 뜻합니다. '페르소나'[28]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하는데 말에는 '울리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고 있는 '가면' 뜻합니다. 시대에 마이크가 없었으므로 가면을 씀으로 소리도 커지고 인간의 특징도 표현됩니다. 가면에 따라 사람의 소리도 달라집니다. 목소리는 가면들 사이에 혼란을 가져올 없습니다. 처음에는 무대가 야외무대같이 닫혀 곳이 아니어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해 가면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단어가 유래합니다. 그리스도론 이전부터 페르소나라는 말을 쓰기 시작합니다. 성서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론이 태어나기 이전의 시대에 쓰였던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는데 하느님은 인간을 자신의 파트너 동반자로 불렀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파트너, 동반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론은 그리스 철학과 조금씩 섞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철학은 개인주의적이고 개별적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의 파트너로 존재하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에 관해서는 7번이나 공의회의 주제가 정도로 많은 의견이 있었습니다. 교부신학에서 보면 교회의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해 많은 논의를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인간을 설명하려면 하느님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이렇게 의문을 품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섬긴다면 사람은 혹시 다신주의자는 아닌가? 예수님이 인간이시라면 예수님은 () 아니지 않는가? 또한 예수님이 신이라면 예수님은 진정한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교부들은, 하느님은 하나의 형태로서 하나의 물질로만 이루어지신 분라고 정의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삼위(三位)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십니다. 삼위는 사랑 안에서 서로 관계를 갖고 인간과도 관계를 갖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라는 안에는 관계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떼르툴리아노 교부께서는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라틴어로 인간에 대해 말하기를, 오리제네스는 그리스어로 히포스타시 성부는 성자와 같은 분이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와 같은 분이 아니시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가 아니시다. 각각은 개인적인 분으로 삼위이시다. 여기서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무대 위에서 가면을 다른 사람과 혼동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위가 개별적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페르소나"라는 말은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아니므로 단어가 한정되어 있어 번역이 어렵습니다. 삼위일체에서 라는 단어는 원음대로 페르소나 번역을 하겠습니다.

사회교리 34항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드러난 하느님 신비의 계시는 또한 사랑으로 부름 받은 인간 소명의 계시이기도 하다. 계시는 인간의 존엄성과 남녀의 자유의 모든 측면과 인간의 사회적 본성의 깊이를 밝혀준다. 하느님의 모습과 닮은꼴로서 인격체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관계 안에서 다른 나와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실존까지도 포함된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이시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시며 분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의 친교 안에서 인간은 자기 존재와 역사의 기원과 목표를 발견하도록 부름 받는다. 기쁨과 희망에서는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주십시오. …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 21-22) 라고 기도하실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를 열어주셨으며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과 신적 위격의 결합이 지닌 어떤 유사성을 가르쳐 주셨다. 유사성은 지상에서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루카 17,3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