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 그물 - 일치의 영성
개인기도와 그 기도의 효력을 위한 세 가지 조건
저는 기도가 우리의 영혼에 얼마나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알게 되면서, 기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 성서와 교회의 여러 교부들과 성인들의 생각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알퐁소 마리아 데리궈리 성인의 ‘기도의 좋은 방법’이라는 널리 알려진 작은 책은 제게 아름답고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주교이자 교회 학자였던 이 성인은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모든 이가 기도의 가치를 깨닫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한다.”라는 유명한 금언이 바로 그의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묵주 기도나 그 이외의 어떤 기도문을 바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다 분명한 뜻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
성화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인 구원의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성인들과 신학자들은 “믿음의 은총은 거저 주어지지만, 믿음을 항구하게 지킬 수 있는 은총은 청해야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 7, 7) 그리고 참으로 너그러우신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요한 14, 13)라는 말씀을 통해 그분께 물질적인 은총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 필요하고 방해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더 큰 은총을 보내주시고 계신다는 뜻으로 알아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구하면 받는다.”(마태오 7, 8)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가 의인이건 죄인이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레고리오 성인도 “죄인도 애원하면 그의 탄식이 하느님께로 올라간다.”하고 했습니다.
기도가 답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오히려 그에 합당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세 가지 조건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 중 첫째는 겸손입니다. 기도의 답을 얻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십니다.”(야고보 4, 6)
구약의 집회서는 겸손한 영혼이 드리는 기도는 하늘을 뚫고 거룩한 옥좌로 나아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영혼이 죄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를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하느님께 구하는 이가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입니다. 즉 반드시 얻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 이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바실리오 성인은 ‘은총을 얻지 못하는 것은 신뢰심이 없이 청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청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야훼께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과 같으니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든든하리라.”라고 말합니다.(시편 125, 1)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이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ㄴ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코 11, 24)
세 번째 조건은 항구심입니다. 귀찮게 졸라대어서 마침내 청한 것을 얻어내는 끈질긴 사람의 비유가 이를 확인해 줍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우리의 기도가 ‘항구하고 집요할수록’ 하느님께서 더 받아 주신다고 합니다.
고르넬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귀찮은 존재가 되기까지 항구하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졸라대는 사람들을 몹시 귀찮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참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은총을 구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졸라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집요하게 애원받기를 원하시고, 집요함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를 바라시며, 그 집요함에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집요함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분만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마음에 들게 하는 일입니다.”
베라르미노는 말합니다. “항구심의 은총은 한번이나 몇 번 청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은총을 얻으려면 항상, 죽을 때까지 매일 청해야 합니다.”
그밖에 거의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해서 청하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청하는 사람은 날개 없이도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이제 기도의 효력을 얻기 위한 모든 조건을 알았으니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미 하고 있는 기도 외에 또 다른 여러 종류의 기도의 횟수를 더 늘려서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바치는 기도문의 내용들을 마음속으로 깊이 느끼고 이를 강조하도록 합시다.
예를 들어 ‘성모송’을 외울 때마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구절에 중요성을 부여하도록 합시다.
또 ‘주님의 기도’는 특히 후반부도 그렇지만 전반부가 바로 우리와 다른 이들의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이루어지소서.”
‘성모찬송기도’는 온통 구원을 청하는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기도는 성모마리아께 먼저 찬송을 드리고 난 뒤 ‘이 귀양살이가 끝난 다음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하고 청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까지도 지워 버리려하는 사고방식이 만연한 현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마약중독, 자연파괴, 대량학살 등 이 땅위에서 전례 없는 죄악들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삶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 땅위에서부터 서로간의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모시고 그 같은 삶을 앞당겨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거나 받지 못하거나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이런 내용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과거의 하느님께서 정의로우신 분이셨다면,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역시 정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완전한 기도가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이 세 가지 조건들은 기억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것은 겸손과 신뢰심, 그리고 항구심입니다.
겸손은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며 기도하는 것이고, 신뢰심은 비록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렇게 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구심으로서 하느님께서 귀찮아하실 정도로 졸라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성인의 금언 “기도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멸망한다.”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2002년 2~3월 일치의 영성
기도란 무엇인가?
-파스콸레 포레시 신부-
참 의미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루 생활 중 묵상이나 성서를 읽는 것, 또는 성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내적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해 하느님과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단순히 묵주 기도나 아침저녁 기도 등을 바치는 것도 참 의미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 종일 이런 기도들을 바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되게 기도 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영적으로 우리가 처한 조건들, 우리의 걱정거리들, 아름답고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바치는 기도들을 넘어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부르신다는 아름다룬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성소’란 무엇인가요? 이에 대한 답은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만남에 대한 부부분에 아주 아름답고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쓴.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데도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코 10,21)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이렇게 바라보시고 사랑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들 따르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생활의 본질은 하루 온 종일, 그리고 매일 예수님과 형제 관계와 부자(父子)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는 그분과 관계를 맺고 침묵 가운데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기도 본질적 참 모숨
예수님과 맺는 우리의 관계는 ‘하느님을 선택’ 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온 일생동안 그분을 우리의 모든 행위의 첫 자리에 오시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기도는 참 ‘기도’가 될 수 있고 기도의 본질적인 참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이 인간임을 나타나게 됩니다.
기도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마음기도’입니다. 이는 곧 묵상을 말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성서나 성인들의 글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천천히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상은 그것을 하는 여러 방법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 조용하고 평온한 시간을 갖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묵상 중에 걱정거리가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생각해 주세요. 저는 단지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밖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청원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청하는’ 기도라고 해도 그 본질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청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되도록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이 있을 때, 예수님께 평온한 마음으로 이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분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젯거리, 어려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복음은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마태오 6,8)라고 말합니다. 이를 믿기에 선물을 하듯 예수님께 말씀드리고, 자신을 온전히 드리며. 그분과의 만남에 대한 기쁨으로 자신들 내어 맡기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가장 아름다운 기도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그리고 그분 안에서 성삼위께 말씀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모든 어려움, 보잘것없음, 저의 잘못, 약한 믿음, 생활 속에서 만나는 어려움과 고통을 다 알고 계십니다. 저는 지금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당신을 관상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감
이렇게 하는 것은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즉 그분을 발견하고 참된 우리의 집에서 살기 위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들이나 우발적인 사건들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순간입니다. 사실 우리 각자의 집은 성삼위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과 그분들 안에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이 계신 곳입니다. 세상에 잠겨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세상이 참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참된 집. 참된 세상, 성삼위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순간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이 ‘관상의 생활’은 현실의 회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참된 생활이며, 이를 통해 매일의 구체적인 삶을 그리스도인답게 직면하게 됩니다. 묵상한 시간동안 참된 삶을 살았기에, 즉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기에 온갖 문제와 더불어 매일의 복잡한 삶, 슬픔, 영적․육체적 피곤함 등을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침묵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그분께서는 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그분의 말씀을 들을 줄 모릅니다. 매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것들의 소리로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관상에 주어진 시간마저 빼앗고자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소리를 듣는데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외적으로가 아니라 내적으로 침묵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열정과 흥분, 그리고 모든 마음의 동요를 지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이런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아주 작습니다. 그러므로 그 목소리를 잠지하기 위해서는 정말 침묵해야 합니다. 그런데 묵상은 외적인 모든 소리를 끌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내적으로 침묵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여러 문제들 때문에 마음이 동요될 때 그분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하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범이 되시고, 그분의 삶은 우리의 삶의 본보기가 됩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그분의 삶은 기적 등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삶으로 마감됩니다. 로마인들은 그분께서 누구이신지를 몰랐습니다. 유다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는 엘리아나 다른 예언자로 생각했던 사란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이 일도 안 되고 저 일도 잘 안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릴 때, 그분께서는 “나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지 않았느냐? 이것이 네가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나머지는 내가 생각해주겠다. 성공이나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나와 이러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답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일상사를 넘어 영원한 세상에서 살도록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몇 가지 예에 불과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그분과 이런 대화를 할 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 점에 있어 하혈하는 여자의 일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청하러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 사이를 뚤고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서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의 옷을 만지자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힘이 빠져나간 것을 느끼시고 제자들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답했습니다.(마르코 5,25-31)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도’했지만 단 한사람만이 제대로 그분과 대화하는 방법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올바른 ‘기도’를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겸손한 기도, 믿음으로 가득 차고 자신을 내어 맡기는 소리 없는 기도에 답하시기 위해 그분의 몸에서 기적의 힘이 빠져나간 것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기도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기도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평온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처럼 고통을 받더라도 고통을 초월하는 평화를 간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즐겨 우리와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모르는 기쁨이라고 하신 그 기쁨을 느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머물렀던 하늘의 한 조각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갈증을 해갈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비록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단지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말을 세상에 주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말이 필요 없으며,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계속되는 그분과의 대화 속에 남아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 하느님을 줄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소리기도’(염경기도)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기도’(묵상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분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마음기도’, ‘소리기도’, ‘화살기도’, ‘묵주기도’등 단순하면서도 널리 알려진 모든 형태의 기도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만심에는 이런 기도들이 너무 단순한 것들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하느님과 관계를 갖게 해 주는 기회들입니다. 물론 이 하느님과의 관계는 생활 중에 피어나지 않는다면 기도 중에도 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온전히 하느님 안에 우리 삶의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참되게 ‘기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더 없이 아름다운 현실
우리가 예수님과 이런 참된 관계를 갖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하루 생활 중 가장 아름답고 가장 살아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샘솟는 물의 샘이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을 것이다.”(요한 7,38)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이고 완전한 평화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단지 하느님께서 주실 수 있는 가득함을 지녀야 합니다. 이 가득함은 우리 주위에 평화와 평온함을 전해 줍니다. 이 때문에 기도하는 순간은 우리의 하루 생활 중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우리의 ‘참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은 세상 한 가운데 머물러 살면서도 서서히 우리를 에워싼 세상을 벗어나 예수님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이런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이런 그분과의 대화는 그분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마태오 6,7)라고 하셨듯이 말로만 이루어진 대화가 아닙니다.
이는 깊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 맡기며 필요한 것을 청하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잘 청하지 못할 때 우리를 대신해서 청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참된 기도 생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살도록 불렸습니다. 참된 우리의 성소는 예수님을 따르며 ‘거룩한 가정’에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란 우리의 ‘참된 가정’, 우리의 ‘참된 집’에서 성삼위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이런 것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전적으로 살아간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2002년 4월 일치의 영성
성삼위와의 관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심으로써 우리는 성부의 아드님이신 그분처럼 성자 안에서의 자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마음속에 무한한 보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우리 안에 있는 심연, 심해, 무한함, 우리 안에 현존하는 ‘성스러운 태양’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바로 거룩하신 성삼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삼위와 더불어 살 수 있으며. 그리스도화 된 우리 자신을 되찾기 위해 성삼위 안에서 자신들 온전히 잃어버리도록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혼의 덧문’을 닫고 ‘영혼의 내문(內門)’ 을 열어 성삼위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원하신 분께서 사시고 참되신 분께서 현존하시는 우리 영혼 깊은 곳의 천국에 머물도록 하는 초대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하신 성삼위께서 바라시는 것은 기도만이 아닙니다. 유일한 사랑이신 성삼위의 세 위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천상의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성삼위와의 관계에 관한 이 주제에 대해 저는 장소와 지역은 다르지만 매번 같은 범주의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를 통해 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시 한번 성삼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그 방법들이 얼마나 풍요로움을 지닌 것들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깊이 알아보고, 완전하게 하고, 우리 개인의 영성 생활을 위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임을 강조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성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성부께서 계십니다. 대양에 잠긴 한 방울의 물처럼 우리는 우주만물에 속해 있으며, 이 우주 만물의 근원이시고 이를 지탱해 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작은 마음속에도 계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참으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그분을 만납니다. 우리가 바칠 수 있는 가장 성스러운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분께 필요한 은총을 청합니다.
우리 영성을 특징 지워주며 우리 카리스마가 강조하는 것은 베드로 사도가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1 베드로 5, 7)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께 우리의 걱정거리를 맡겨 드렸을 때, 우리는 그 걱정에서 곧 자유로워 졌고, 걱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분의 사랑으로 걱정거리가 수없이 해결됨을 보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아버지에게는 자신을 온전히 맡기며,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바로 아들의 지주이며 확신인 것입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 두팔에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성자. 우리 안에는 성자께서도 계시니, 이분은 사람이 되신 말씀, 곧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현존하시는 성체 안에서, 말씀 안에서, 형제와의 일치 안에서, 가난한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대리하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고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특별한 모습 안에서도, 즉 그분의 버림 받으심 안에서도 우리 영혼의 정배로서 그분을 알아보고 사랑합니다. 지금까지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정배이셨으며, 우리 생명이 다할 때까지 어떤 정배이실지 우리는 알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 일생의 모든 시련 안에서 빛과 평화와 힘을 되돌려주시기 위해 그 시련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를 제안해 주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정배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계십니다. 그분의 현존과 그분께서 주시는 분위기로 새로워진 사람들이나 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스러운 효과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안에 우리 자신을 의탁합니다. 그분께 청하면 늘 답을 주시고 지혜가 담긴 말을 떠올려 주시며, 우리에게 위안을 주시고 우리를 지탱해 주시며, 친구처럼 특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아버지, 정배, 친구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세 분이시며 동시에 한 분이시고 유일한 사랑이신 분께서 우리 영혼 안에 자리하고 계십니다.
그럼 성모님과 더불어 성삼위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합시다. 성령께서 성모님 안에 내리셨고, 성부께서 전능하신 능력을 펼치시어 말씀께서 성모님 안에 강생하셨습니다. 세 위께서 우리의 작은 마음 안에 살아 계시는 것처럼, 성삼위께서 사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영원한 현재 속에 들어가, 계속 현 순간을 살면서 성모님과 함께 이 관계들을 더 돈독히 하고 지속시켜 나가도록 합시다.■
2002년 4월 일치의 영성
‘많이’ 가 아니라 ‘어떻게’ 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역사상의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게다가 어떤 순간에는 실패하신 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각하신 ‘그 계획’ 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그분의 뜻을 찬미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가 시간 안에서, 바로 이 순간에 일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실현해야 할 일들 중 그 순간에 해야 할 일 하나만을 잘 하도록 요청합니다.
우리가 분해된 기계 조각처럼 우리 사이에서 일치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치되어 있다면 한 사람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연결된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는 크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늘에 비하면 작은 것이긴 하나 우주적인 차원을 지닌 것이며 하늘나라의 맛을 지닌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미소 짓는 것, 해야 할 일, 운전하는 것, 식사 준비, 활동을 조직하는 것, 고통 받는 형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슬퍼하는 것, 악기를 연주하는 것, 편지나 기사를 쓰는 것,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것, 빨래하는 것 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그 모든 행위는 형제와 하느님께 우리의 사랑을 보여 드릴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떠나는 선교사들이 십자가를 지니고 떠나듯이, 우리는 세상을 복음화 하기 위해 우리 마음과 손 안에 이 모든 도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2002년 5~12월 그물 - 일치의 영성
천사처럼 기도하라
기도의 일반적인 정의
모든 영성은 기도를 배우는 학교입니다. 각 영성의 창시자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자신의 특은의 길을 알려 주는 기도 방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비록 처음부터 교회가 신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가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 방법이 다양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따라 포콜라레 운동의창시자인 끼아라 루빅은 기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고 우리 영신 생활의 산소이며,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표현이고 우리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입니다.”
“기도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인간의 존재 자체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이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이긴 하지만 하느님과 마주 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음을 뜻하며, 하느님의 상대자, ‘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과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인간 특유의 것이며, 그를 형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이 특별한 성소를 실현시키지 못한다면 그는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관계를 키워나가고 그분과 친교를 이루는 것은 곧 기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단지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생각하시고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대로 온전히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성소가 기도라는 것은 여러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볼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자신을 하느님께, 어떤 절대자에게 향하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입니다.”
“간디는 육신에 음식이 필요한 것보다 영혼에 기도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육신은 단식할 수 있지만 영혼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믿음을 지닌 형제들을 알게 되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기도문들은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도록 해 주는, 드러나지는 않으나 강한 하느님의 힘을 증거해 줍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는지 얘기해 주십시오. 그럼 당신이 그리스도인인지, 무슬림인지, 불교도인지, 힌두교도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어떤 특성을 지녔기에 특별한 영적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 하느님께서는 곧 ‘아빠’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과 끝없이 신뢰에 찬 어조로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제 2의 위격으로 성삼위 안에 계시면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 특별한 기도를 통해서도 당신 본연의 모습을, 곧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면서 당신께서 지니셨던 이 기도의 특권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만 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당신의 형제가 되게 해 주셨으며, 우리에게도 성령을 통해 성삼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통하여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하느님을 “아빠, 우리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그분의 사랑에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으로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분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확신과 안전함, 그분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위로와 힘,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속에 피어나는 열정 등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특유의 기도이며 다른 곳에서나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기도입니다.
대개는 어떤 성스러운 존재를 믿는다면 그 존재 밖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숭배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단지 인간의 개인적인 것일까요? 근본적으로는 개인적인 행위이지만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서로가 일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신비로서 서로 통하는 유리 실험관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유리관에 물을 넣으면 연결된 모든 실험관 속의 수위가 전체적으로 똑같이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기도를 할 때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영혼을 들어올려 주는데 한 영혼이 들어올려지면 다른 영혼들도 함께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교회의 공동체적인 현실입니다. 이는 진리이며 특히 전례 기도의 여러 표현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전례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중 가장 드높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바로 교회 자체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계속적인 기도
예수님처럼,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하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을 늘 매혹시켰던 것은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한다.”(루가 18, 1)는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삶이 계속적인 기도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동방 교회가 가르치는 ‘마음의 기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끼아라도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감동을 받았으며, 마리아 사업회의 첫 회칙에서부터 늘 이를 우리 삶의 본보기로 제시했습니다. 끼아라는 자주 이런 질문을 받거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늘 기도하는 것. 어떻게 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혼잡한 일상생활 속에서 늘 기도할 수 있을까요?”
끼아라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우리의 길을 따라 항구하고 지속적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비춰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1962년 스위스 ‘오베리베르’에서 끼아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되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실제로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본질이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의 모든 행위가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 되게 한다면 하루 온종일이 계속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하면 됩니다.”
끼아라는 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만일 현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면 나는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매 순간 기도문을 외우기보다 하느님의 뜻을 잘 해야 합니다. 만약 하느님의 뜻을 잘 한다면 저는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느님의 찬미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
항상 기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모든 행위를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행위가 되게 하면서 입니다.”
그리고 짤막한 기도문들이나 사랑의 표현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사랑의 표현들에는 “‘예수님,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무엇이 중요한가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끼아라는 초창기 때 트렌토에서 로마까지의 기차 여행이 마치 계속적인 기도와 같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침묵 중에 묵주기도를 드리기도 했지만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교회의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흠숭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대중교통 수단이나 버스로 여행하거나 걸으면서, 그리고 온 도시를 묵주기도로 엮으면서 기도를 위한 여러 가지 방법과 수많은 기회를 찾아내곤 했습니다.
최근 “지치지 않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야한다.”는 마리아 사업회의 회칙 한 구절을 설명하면서 끼아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과의 일치를 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끌어안으면서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무의식중에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열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늘 경험해 왔듯이, 우리는 하루 온종일 형제를 사랑한 후 하느님과의 일치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느끼는 것’은 그분과의 대화가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대화는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바뀜에 따라 기도하는 방식 또한 변화됩니다. 특히 인간 활동 안에서의 노력과 노동은 기도이며, 인간의 사업을 통해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대한 성령의 답에 따른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 이는 기도의 행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삶 전체가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단지 그분을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휴식을 취하고 때로는 희생하며, 고통 받고 또한 단지그분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위를 가능한 한 완전하게 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세상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연장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행위는 성스러운 행위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 시대가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화되어 가는 세상과 온 우주를 바라보면서 인간은 “땅을 정복하는”(창세기 1,25) 자기 본연의 의무를 기억하게 됩니다. 이 기도 방식은 무엇보다도 “항상 기도하라.”(루가 21,30)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노동을 통해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의 창조사업에 협력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를 하느님께 바쳐드리면서 잘 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치의 정신을 전하면서 교회와 사업회를 위해 일하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1958년도에 끼아라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사업회의 회원들은 그들의 삶이 온통 사랑이 되어야 하므로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 비결은 계속적인 사랑이 있을 때 계속적인 기도가 있다. 사랑은 유일하고 전적인 것일 때 계속적인 것이 된다.”
사랑은 우리 이상의 특징이기도 한 전적인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 안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또 다른 예수가 되기 위해, 그리고 그분처럼 성부께 계속 기도함으로써 성부의 영광과 찬미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영성을 실천해 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남아 있을 때 커다란 은총이 있습니다. 얻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 순간에 그분 안에 남아 있으면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한 가지 것에 열중하는 동안 모든 것을, 무한한 것들을 얻게 됩니다.”
포콜라레 운동의 ‘일치’의 정신 안에서의 기도,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
“일치는 포콜라레 영성 전체를 요약한 단어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과의 일치, 형제들과의 일치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형제들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는, 온통 복음적인 우리 특유의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대개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이나 자연 속에서 그분을 먼저 찾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형제를 통해 즉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느님을 찾고 발견합니다.
우리는 모든 형제와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할 때 그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지 이렇게 함으로써 그분과의 일치 또한 보장이 되며, 우리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 계시는 그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과의 일치는 우리로 하여금 형제에게로 향하도록 우리를 밀어 줍니다. 또한 이 일치는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실 되고 부족하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으며, 전적이고 온전하며,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항상 목숨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고 일치를 이루는 능력을 지닐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규범 중의 규범으로서, 그 어떤 다른 규칙에 앞서 실현해야 할 것으로서 일치를 모든 것의 바탕에 둡니다. 이는 우리의 좌우명이며 그 위에 집을 짓기 위해 기초가 되는 반석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와 기도, 호흡까지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이 단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기도 역시 일치 안에서 했을 때, 그리고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예물을 놓고 먼저 형제들과 화해하라.”는 복음 말씀에 따라 기도에 앞서 모든 이와 더불어 사랑의 친교가 이루어졌을 때에만 그 기도는 가치가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의 근본, 형제에 대한 사랑
“우리는 성덕의 길로 가도록 도와주는 우리의 영성을 살면서 하느님과의 일치가 자라남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성 전체를 온전히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형제는 우리를 하느님께 데려다 주고 또 데려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 형제를 통한 길을 지니고 있지만 형제는 하나의 ‘통로’임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샘이신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녀 가타리나의 영적 체험을 기억했습니다. 가타리나 성녀는 다른 처녀들과 함께 폰테 브란다(Fonte Branda) 샘물가로 물을 길으러 가곤 했습니다. 항아리는 위 부분이 뚫려 있어 물을 넣을 수 있고, 옆으로는 물을 따르거나 마실 수 있도록 작은 주둥이가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성녀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 항아리를 가리키시면서 샘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부어주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사랑을 이웃에게 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물을 부어주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 항아리는 바닥이 나고 더 이상 이웃에게 사랑을 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항아리를 샘에 잘 붙여놓으면 비로소 이웃에게 항상 사랑을 부어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현존해 계시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은 꼭 필요한 것 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기 위해
"우리 사이의 일치는 각자가 우리의 특은에 따라 하느님께 잘 일치되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성서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치는 무엇보다 먼저 개별적으로 갖는 하느님과의 일치이지만 우리의 노선에 따른 것이어야 합니다. 이 하느님과의 일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인이 되는 것을 뜻하며,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기도의 정상에 다다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즉 예수님처럼 성부와의 일치에 이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24 루가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밖으로 나와 다른 이들을 사랑하면서 우리 자신을 극기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끊어버리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극기의 길과 성덕의 길로서 사랑을 제시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에 애착을 가질 수 있음을 경힘하게 됩니다. 그러니 홀로 십자가 아래 계셨던 성모 마리아를 본받으면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항상 더욱더 그리고 항상 더 빨리 고통 너머로 가면서, 잃어버리고. 잃어버리고, 또 잃어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살고자 한다면 적어도 현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완전함을 사는 것이며,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분께서 계시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 부활하길 예수님의 선물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영성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 순간부터 이에 관한 경험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운동의 정신을 살기 시작하는 첫 순간부터 전적으로 형제를 사랑한 후 하느님과의 일치를 실제로 느끼게 되며, 그분과의 감미롭고 자연스러운 대화는 당연한 것이 됩니다.
해가 지남에 따라, 빈번하고 강한 이 대화 속에서 그분과의 일치 없이는 일하거나, 행동하거나, 잠자거나, 살 수 없게 됩니다. 제 생각에 이 계속적인 친교는 늘 기도해야하는 복음적 의무에 부합된 것으로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이를 요구하신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특은, 이 일치의 정신을 잘 분석해 본다면. 이는 두 가지 면을 지니고 있으며, 두 가지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특은이 주어진 것은 오로지 이 특은을 나누면서 우리의 형제들과 일치를 실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를 살면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다다르기 위한 것입니다.
시련과 은총 - 일치를 위한 선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일생의 온갖 시련들을 통해서 이 일치가 자라나게 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과의 일치는 그분께서 우리 영혼에 주시는 수많은 은총을 통해서도 자라나게 됩니다. 성 바오로는 자신이 받은 은총을 열거하면서 심지어는 계시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이 은총은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강한 현존이며. 그분의 현존을 통해서 우리는 항상 새롭게 회개하고 특별한 깨달음을 터득하고 성스러운 충동으로 새롭게 살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고, 여러 시련들도 극복했으며. 여러 가지 은총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작은 나무가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우리 영혼 안에서 자라났으며 그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과 이룬 일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일치로부터 오는 많은 결실들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영혼의 감각으로서가 아니면 알아 볼 수 없는 매우 중요하고 기적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잃지 않도록 하며, 이것이야말로 저 세상에서 살게 될 삶의 한 부분임을 기억하면서 잘 보호하고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네 가지 지침
그러면 어떻게 이 영적인 자산을 보호하고 거두어들이며 자라나게 할 수 있나요? 네 가지 지침을 실천함으로써 입니다. 곧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도록 노력하고, 크고 작은 시련들을 항상, 즉시, 기쁘게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끌어안으며 극복하고. 하느님께서 우리 일생 중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신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내면의 생활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므로 불 속에 기름을 붓듯이 기도생활을 특별히 잘 하는 것입니다.
“불 속에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말하듯 하느님과의 일치는 바로 우리가 사랑받았다고 느끼는 그분과의 계속되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생활 중 이 대화로써 각자의 영적인 삶을 키워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늘 이 삶을 나누어주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도록 하느님과의 일치를 많이 모아들여 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이 일치는 영혼의 “샘솟는 물”과 같습니다. (요한 7.38 참조)
“우리는 물을 채우는 물탱크가 되어야 하며, 댐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위(水位)를 항상 높여야 하며 모든 것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삶으로부터,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로부터, 전례신학. 성서 복음에서 등 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댐 속에 저장해 두지만 댐의 수문을 열어서 모든 물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수로를 통해 조금씩 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한 방울의 물이나 침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여행’에서는 때로 침묵을 지키고 하나가 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성이 ‘일치의 특은’이라고 불린다면 이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하느님과의 커다란 일치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천사처럼 기도하라(4)
“우리는 영원하고 항구하며 지속적인 기도에 이르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는 즉 마음이 늘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체험과 고통을 치러야 하며,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 받으신 예수님을 끌어안고 ‘형제’라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있어 하느님께서 전부이시라 그 어떤 순간에라도 이 일치는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의 데레사 성녀나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 같은 성인들이 모든 이를 초대해 온 그 ‘묵상기도’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성을 ‘공동체적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통해 예수님께 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형제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 이르게 해주는 ‘성사’입니다. 봉쇄 수도원의 수녀들에게는 장상, 베일, 침묵 등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형제가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 하느님과의 일치는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그분과의 대화가 시작될 때까지 잘 가꾸어야 합니다. 이 대화가 없다면 시련과 유혹, 커다란 근심들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만 ‘모든 이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부 안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이가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성부와 성령과의 대화를 시작하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하며, 우리의 인간성을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음성이 다른 소리들보다 더 강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갖는 하느님과의 일치와 형제들과의 일치를 지속시켜 주는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매일 더 나아지는 것입니다. 아침 묵상에서 그렇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지는 것, 이는 단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항상, 즉시, 기쁘게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에 대한 사랑을 키움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를 발견하고 자라나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자라면 자랄수록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자라게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곧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끌어안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침 묵상 때 모든 고통을, 덕을 실행하는데 따르는 노고를 껴안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면서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보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
‘소리기도’와 ‘마음기도’
이것은 교회의 전승에 의해 알려지고 교회에서 권고하는 두 가지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첫 번째 기도 방식은 ‘소리기도’(염경기도)로 정해진 기도문을 사용하여 하느님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보다 완전한 기도 방식으로서,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마음기도’(묵상기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순수하고 사랑에 찬 대화를 자주 나눔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상수도회 창설의 특은을 받은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설명했듯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개인적인 영성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마음기도’를 하려면, 즉 하느님과 사랑에 가득차고 순수한 대화를 하려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때로는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리고도 이에 도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한편 형제와 함께 ‘거룩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아니 형제를 하느님께 다다르기 위한 길로 삼는 공동체적인 영성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기도’를, 하느님과의 다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짧은 순간이나마 영신생활의 초기부터 이를 체험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 종일 형제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사랑한 후에는 하느님과 생생한 관계를 맺게 됨을 봅니다. 결국 그분께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마음으로 그분과 순수하고 신뢰에 찬 대화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가고 해가 가면서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이 대화에 근거를 두고 하게 되며, 그것이 우리가 하는 행위의 바탕이 됩니다. 이는 참으로 큰 은총이므로 이를 잃지 않도록 잘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기도’라는 하느님과의 생생한 대화를 늘 신선하게 유지시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침기도 저녁기도 미사. 묵상 등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요청하시는 기도 시간을 충실히 이행해 가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준비 과정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와 ‘직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전 준비한 영혼이 모든 것에서 애착을 끊은 상태에 머무는 것을 뜻합니다. 이 준비는 우리 모두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요? 우리는 늘 애착을 끊어버림과 가지치기. 특히 형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랑을 지니도록 자신을 끊어버리는 것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이 준비를 잘 갖추고 있습니다. 최소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매일 노력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아시아에서의 기도 생활에 대한 어떤 인도 주교님의 지혜가 담긴 글을 읽고 난 후 저는 ‘끊어버림’에 대해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끊어버림’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기도의 조건이 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빛을 주셨던 시기의 우리들의 영혼상태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무(無) 위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無) 위에 일하시고, 그 무(無) 위에서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기 위해 사전 준비뿐만 아니라 그 ‘직전 준비’도 필요합니다. 직전 준비란 이런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기도를 잘하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환경을 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방이나 경당, 정원, 자연 등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늘 하나이셨고 그분과 내적인 대화를 하셨지만 성부께 기도하시기 위해 밤의 침묵의 시간에 한적한 곳을 택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더 좋은 시간과 장소를 찾기로 합시다.
그리고 침묵 중에 마음을 모으고 영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육신을 위해서도 두 손을 모으거나 그밖에 경의를 표하는 자세를 취하며 무릎을 꿇는다든지 자세를 바로 하고 앉는 등 가장 적절한 자세를 취하도록 합시다.
기도를 하기 위해 육체적인 조건도 매우 중요합니다.
힘없이, 집중력도 없이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되거나, 그분께 마지못해 하루 중 기쁨이 덜한 순간을 드리게 되지 않도록, 기도 시간이 되기 전에 너무 피곤에 지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혼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항상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갖도록 하여 마음으로 기도하고 우리가 말로 외우는 기도에 우리의 영혼이 함께 담도록 합시다.
우리는 기도 생활에 필요한 이러한 준비에 보다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기도’라는 ‘하느님의 뜻’을 더 잘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말씀드릴 기회가 될 수 있는 ‘소리기도’를 소홀히 바쳐 드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도달하고자 하는 하늘나라의 생활은 사도직보다는 오히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와 흠숭의 생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에서 하게 될 생활을 익혀두어야 합니다.
기도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전반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의 하나는 기도하기 위한 시간을 찾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바로는 기도란, 시간의 문제이기 이전에 우리의 내적 자세이며 삶에 필요한 요건이요, 하느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단 한 가지 것’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다른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천사처럼 기도하고 짐꾼처럼 일하자. 라는 표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짐꾼처럼 일하자’는 두 번째 구절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종종 마리아 사업회 안에서는 모두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때로는 과로로 허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천사처럼 기도하고....”라는 첫 번째 구절이 언제나 “짐꾼처럼 일하라.”라는 구절과 병행하고 있는지요? 과연 우리는 천사처럼 기도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당신과 그처럼 쉽게 친교를 맺을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신 하느님,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마음기도’를 보존하고 성숙시키며, 습관화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우리는 기도생활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그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천사처럼 기도하라.(6)
복음 말씀 중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오 16, 26)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자라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사도직 활동에만 (‘활동주의의 오류’라고 말할 수 있는 활동에) 쏟아 매달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독특한 영양분을 얻기 위해, 곧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작고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면, 또 우리에게 있어서 신성한 의무인 기도를 분심 중에 한다든지 형식적으로 하거나 서둘러 하고, 혹은 단축시켜 한다면 우리가 여러 사람들을 정복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틀림없이 우리 중 그런 식의 생활을 하는 이들의 내적 성장을 도와 올바른 노선을 향하게 해 주는 가장 적절한 교정 방법이 될 것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루가 10, 42)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필요성이 되살아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도직은 ‘번성하라.’라는 말을 실행하기 위해서도 다시금 우리를 올바른 길 위에 놓아줍니다. 사실 이 사도직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발산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결핍으로 인해 하느님과의 일치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줄어든다면 과연 우리가 발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여러 형태의 하루 일과 중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밑바탕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빛나는 기도를 두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매달, 매주, 매일의 계획을 세우면서 기도에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만일 기도가 영혼의 양식이며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은 것이라면, 인간 존재에 있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인 음식, 수면, 노동 등을 위한 시간과 더불어 기도를 하기 위한 시간도 가질 수 있도록 생활계획을 해야 합니다. 이 계획을 세울 때에는 다른 이들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묵상
성덕을 향한 우리의 ‘거룩한 여행’에 있어 묵상의 아름다움과 유익함을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기도’에 필요한 장소와 시간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숭고한 기도 방식인 ‘마음기도’는 무척 어려운 훈련이지만 만일 우리가 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매번마다 ‘마음기도’를 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와 의지와 마음을 써서 해야 합니다. 머리로는 우리가 듣게 되는 말을 생각하고, 의지로는 생각한 것을 행하고자 결심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서 사랑의 열렬한 불꽃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열정을 따를 수 있도록 약속한 것을 사랑을 갖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 간결한 정의 안에도 ‘마음기도’가 묵상의 본질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내포하며, 특히 사랑을 강조함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묵상의 목표는 하느님의 사랑을 좀더 잘 알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어떤 형태의 기도에 있어서도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만약 이 목표는, 곧 명상, 묵상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묵상은 단지 메마른 사고의 훈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묵상의 구성요소이며 시간 상 먼저 오게 되는 명상은 사랑에 속한 것이며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묵상은 지적인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음의 결실로 끝을 맺습니다. 묵상은 ‘정신과 마음의 신학’, 즉 정신과 마음에 의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에 의한 ‘마음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마음기도’에 관한 글에서 기도의 모든 단계 안에는 항상 근본적인 두 가지 요소인 ‘자신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이 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과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은 기도의 두 극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홀로 있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무거운 짐을 느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 대한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 그분의 커다란 사랑을 느낍니다.
사실 묵상은 바로 내면의 으로서, 이 두 가지 요소는 사랑 안에서, 또 일치의 특은의 노선 안에서 우리를 성장하게 해 줍니다.
모두를 위한 제의
묵상을 우리가 성화되기 위한 도구로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마음으로 묵상에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성화를 이루어 가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묵상을 시작할 때 우리는 즉시 성령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묵상시간을 그분께 맡겨드리며 우리 모두를 그분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고 성인이 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묵상을 시작하며 그 시간을 온통 하느님과의 일치가 더욱 더 깊고 강해질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도록 노력합니다.
우리 사이의 예수님의 현존과 형제들과의 새로운 관계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외성(外城)인 ‘사업회’를 건설하고자 전념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하느님의 현존인 영혼의 성, 즉 ‘내성(內城)’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묵상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해야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혼의 문을 그분께 열어드리기 위한 ‘성스러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모으기 위한 작은 노력들이나 그분을 발견하기 위해 ‘감각을 끄는’ 것을 의미하는 ‘영혼의 덧문을 닫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계시는 우리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어, 가득한 당신의 현존과 더불어 가져오시는 아름다운 것들로 우리 영혼을 충만케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신비가들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께서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이들처럼 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가장 용감합니다. 그들은 망설이거나 기다리지 않고 즉시 엄마의 품에 안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마 품에 안기는 어린 아이처럼 그분께서 계시는 그곳으로 즉시 들어가 그들과 관계를 맺고 그분께 말씀드리며, 즉시 그분 안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루 온종일 열심히 산다면, 우리는 30분 동안 마음을 모을 수 있습니다. 먼저 묵상을 하기위해 평온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 자신을 하느님 앞에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낚아’ 당신께로 들어올리십니다. 그때 책을 덮고 그분의 뒤를 따라가서, 그분과 함께 머물고, 그분을 흠숭하며,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참으로 그분의 현존을 느낀다면 그분께 은총을 구하고 모든 것을 청하며 그 순간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만함 속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후 다시 그분과의 일치의 순간이 멈추게 되면 읽던 책을 다시 펴서 계속 읽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영혼의 문'을 열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저희들에 대해 기쁘세요?'라고 여쭈며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머무른 후 ’영혼의 문’을 닫고 나오는 것입니다. 문을 닫고 나갈 때는 꼭 결론을 끄집어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치’의 정신을 생활하는 이들이 자주 무엇으로 묵상해야 하는지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적으로 복음으로 묵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영성들도 아름답지만 우리는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나타내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성서 중 특히 신약성서와 우리의 영성에 관한 책으로 묵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하기 위해서 우리의 영성과 복음, 성서 외에도 미사 책이 매우 유익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의 독서와 복음 말씀에 관하여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사가 영혼에 훨씬 더 유익하고 아름다워집니다.
언젠가 ‘일치의 정신’을 생활하는 한 소년의 질문에 답하면서 저는 어떻게 성덕으로의 길을 달리고 있는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아침 일찍 묵상을 합니다. 여러분이 이야기하듯이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함께 보다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묵상 중 그날 하루 동안 기억하고 생활할 복음 말씀이나 어떤 구절을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현 순간을 더 잘 사는 것’이나 ‘먼저 사랑하는 것’, 또는 ‘하느님의 뜻을 영웅적으로 실천하는 것','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 아버지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 등의 구절입니다. 이처럼 저는 하루에 한 구절씩 실천하려 하면서 이를 통해 성덕으로 달려가고자 노력합니다.”■
2002년 10월 일치의 영성
길이신 분
하느님 나라에서 현 순간을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 순간을 산다면 그 순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워두신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해드리는 것이며, 그 순간에 주어지는 은총과 더불어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현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지 못합니다.
흔히 우리는 그분께 이르기 위한 길을 찾아 좀 착하게 살아가려고 하며 성인(聖人)이 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길이신데(요한 14, 6참조) 어디서 길을 찾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우리 삶의 매순간, 우리를 돕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우리가 당신의 자녀로서 합당한 일을 하도록 도와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이 필요하거나 잘리움과 고통, 죽음과 고뇌가 필요할 때 고통스럽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의 모습으로 현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평범하고 권태로운 생활을 벗어나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순수하고 성스러운 삶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그런 순간이 필요함을 느낄 때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태오 16, 24 참조) 따라야 한다고 그리스도와 함께 수천 가지 방법으로 되풀이되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교회의 법’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삶은 단순한데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삶이 지닌 기쁨, 예기치 않은 일, 노고, 어려움들을 받아들이며 현 순간에 잘 접목되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힘들이지 않아도 모든 것은 다 잘 되어갈 것이며, 우리는 마치 제트기에 몸을 실은 듯 복된 영원을 향해 순식간에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 미래에 대한 인생의 계획을 세우지만 대부분 단조롭고 세상적인 것만을 추구합니다. 일생을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곧 우리의 존재로서 찬란하고 거룩한 모험을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 삶이 얼마나 큰 경이로움을 가져다주는지 알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하느님의 뜻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에 그분의 사랑으로 답해 주십니다.■
끼아라 루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