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그물 - 일치의 영성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97년 1월호부터 ‘일치의 영성’ 난을 통해

포콜라레 운동의 영성을 소개 하고자 한다. 그 첫 순서로,

78년 이탈리아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과 가졌던 끼아라 루빅의 인터뷰를 싣는다.

여기서 끼아라는 자신이 직접 포콜라레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주신 끼아라 루빅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신 것처럼 끼아라 루빅 여사는 수많은 출판물과 책을 통해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작년에는, 신청하지도 않았는데 매우 중요한 “템플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종교를 초월 하여 저명한 인사들이 수상한 중요한 상으로서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스위넌스 추기경, 로저 슈츠 원장 및 한 명의 인도인이 이 상을 수상 했습니다. 끼아라 루빅은 무엇보다도 전 세계에 전파되어 있는 포콜라레 운동을 창설한 분으로 유명하며 모든 연령의 사회의 각계각층에 속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트렌토에서 태어난 끼아라 루빅은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리라 믿어집니다. 여러 해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후 하느님께 관한 특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루빅 여사가 직접 말씀해 주시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능한 한 저는 저의 말을 줄임으로써 그분이 ‘찬란한 모험’이라는 이 아름다운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 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의 체험은 포콜라레 운동의 탄생과 결부된 것입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현재 이 운동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고 교회의 우리 장상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 운동은 하느님의 사업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사업이 그렇듯이, 이 운동 역시 하나의 작은 씨앗에서, 하느님의 손에 들려진 도구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와 집에 있었던 저는, 어머니의 일을 도와 드려야 했습니다. 바로 이날,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이 일을 하러 갔습니다.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저는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제게 ‘너 자신을 완전히 내게 봉헌하여라.’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스쳐간 이 부르심에 감명을 받아 즉시 저를 잘 알고 계시던 신부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며칠 후, 그분은 저의 온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날은 아주 아름답고 특별한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저는 하느님과 혼인했던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단지 제 마음 속에는 기쁨이 가득 찼을 뿐이었고 그 날 있었던 이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에 당겨진 이 기쁨, 이 불꽃은 전염성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직장 일로 혹은 학업 관계로 친구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하느님께서 느끼게 해 주셨던 어떤 매력에 이끌려 저를 따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자 했습니다.


        이로부터 몇 달이 지난, 1944년 5월 13일, 트렌토에 심한 폭격이 가해졌습니다. 그날 저녁,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 우리 가족은 도 시 근교의 산등성이에 있는 숲으로 가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밤중에 비행기들이 트렌토 상공을 날아와서 우리 집이 있는 곳을 폭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날이 저에게는 결정적인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모든 것, 곧 저의 부모님까지도 떠나라고 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저는 비록 우리 집이 파괴되었다 할지라도 트렌토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친구들과 저 사이에는 강한 유대가 맺어졌으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제가 트렌토에 남아 있기를 원하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정은 제 마음 속에 날카로운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을 몹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정말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정의 경제를 돕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을 떠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학교에서 배웠던 말 한 구절이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그 때 저는 자문했습니다. ‘뭐라고? 사랑은 이것까지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의 사랑은 이것까지도 이겨야한다고? 정처 없이 산을 향해 떠나가는 가족들을 내버려두고 나는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사랑은 이것까지 이긴다고?’


        저는 마음속으로 예수께 ‘네’ 하고 답했습니다. 물론 그분의 도우심으로였습니다. 이튿날 새벽 동틀 무렵, 우리는 집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지 보기 위해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집의 벽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내부는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2층으로 거의 기어오르다 시피 하여 가방에 이것저것을 골라 넣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저의 결심을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부엌에 계셨는데 저는 아버지께 가서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느님께 저를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저를 따르고 있어요. 저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께서는 분명 특별한 은총을 받고 계셨다고 믿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정말 평온한 마음으로 제게 허락해주시며 남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계단을 내려서자 저는 폐허가 된 도시로 돌아가고 우리 가족들은 산 쪽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 헤어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제가 지고 가야 했던 짐을 우리 어머니의 굽은 등에 지워 드려야 했던 것은 정말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시가지를 향해 걸었습니다. 온통 폐허뿐이었습니다. 뿌리째 뽑혀진 나무들, 파괴, 잿더미....저는 머물 곳도 정해지지 않은 채 길을 떠난 가족들 생각에 울면서 길을 걸었습니다. 그치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골목에서 한 부인이 뛰쳐나오더니, 제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 소리쳤습니다. “식구가 네 명이나 죽었어!”

        저는 그 부인을 위로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껴안기 위해 저의 고통은 잊어버려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는 이른 아침 여섯시였습니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잿더미 사이를 헤치고 친구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은 모두 살아있었으므로 저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여섯, 일곱 명의 처녀들로서 나이는 15살에서 23살까지였습니다. 며칠 후, 어떤 분이 저희에게 작은 아파트 하나를 내어 주었는데 바로 이 아파트에서 첫 포콜라레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젊었고, 다른 모든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 애타게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약혼자는 전쟁터에서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신의 이상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친구는 정성껏 꾸민 한 채의 집을 갖고 있었는데 폭격으로 이 집이 무너졌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많이 사랑했지만 공부를 이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철학에 커다란 열정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저는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같은 환경을 들어 한 가지 교훈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리고 만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저의 유일한 일생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한 이상을 위해 바치고 싶은 소망이 솟아났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으며 그들은 이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이상이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곧 이 이상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 일생의 이상으로 삼기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에도 11번씩이나 방공호 속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그 방공호 역시 튼튼하지 못했으므로 안전한 곳이 못되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복음을 들고 가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우리의 의문에 답을 주었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러므로 감상주의나 경건주의가 아니고, 다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우리는 즉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마지못해 하느님의 뜻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해 하나의 계획을 갖고 계시며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행한다면 그분이 이 계획을 완성해 주실 것임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거룩한 모험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젊었지만 그 당시의 상황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즉,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의 뜻 한 가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그분 앞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일생의 마지막 날들만이라도 그분의 뜻대로 생활한 것을 보고 기뻐하실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에 대해 복음이 우리에게 답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방공호 속에서 “나는 너희들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라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고 하셨으니 그분이 좋아하시는 계명이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우리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니 이것을 생활화하자! 나는 너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고 너는 나를 위해 너는 저 친구를 위해...”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각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 줄 각오를 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이 새 계명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의 작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한 형제의 죽음을 나의 것인 양 받아들이고, 전쟁 중에 흔히 겪게 되는 이웃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다른 이들의 걱정과 기쁨까지도 함께 나누는 것 등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렇게 항상 다른 이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며 생활하게 되자 우리의 영신생활은 질적으로 한층 나아짐을 느끼게 되었는데 사랑과 애덕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남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고 하신 말씀 역시 얼마나 진실 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예수께서 현존해 계심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계실 때, 우리가 서로 사랑했을 때, 서로 서로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을 때에는 그분이 우리 마음속에 특별한 기쁨과 평화를 느끼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빛을 주셨고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새로운 형제애에 의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완전히 새롭게 깨닫도록 해 주실 분은 바로 그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복음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등불을 켜 놓은 것과도 같이 우리는 그 말씀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들은 말씀이었지만 새롭게 보였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그렇지만 누가 이렇게 삽니까? 저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를 기억하는데 이는 마치 하나의 경종을 울려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 안에 어느 모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폭격이 뜸해진 틈을 타서 우리는 도시의 이곳저곳으로 가난한 사람들들 찾아가곤 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97년 5월 그물 - 일치의 영성


‘하느님의 뜻’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나.(마태 7, 21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지적인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시작된 그 당시, 단순하지만 뜻깊은 한 사건이 우리가 이 진리를 즉시 실천할 수 있도록 그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정결 서원을 한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도록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직도 하느님께 드리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그는 순명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바치

고, 얼마 안 되는 소유물을 버림으로써 가난을 살고 가족과 직업을 떠남으로써 세상을 멀리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봉쇄 수녀원으로 부르신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봉쇄 수녀원의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느꼈지만 그는 하느님께 “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잘 알고 있던 어떤 신부님께 이 사실을 말씀 드렸을 때, 신부님은 그가 세상에 낱아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셔서 그의 결심을 단념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에 순명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로부터 깨닫게 된 것은 어느 길이 더 완전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인이 쓴 구절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거룩한 뜻으로 변화되어 ‘하느님의 뜻 가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이사야 62, 4) 그리스도 교회를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실 것이며 그 이름은 신자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것이며 그 이름은 ‘그 안의 나의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이름은 바로 ‘그들 안의 하느님의 뜻’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성덕의 길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열린 하나의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정인, 어머니, 사제, 노동자, 어린이, 노인, 수도자, 정치가 등 모두에게 좋은 길이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뜻’이라고 부르는 길이었습니다.

        이 단순한 발견은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습니다. 마치 성덕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는I- -'.것 같았으떠 우리가 일샌 통안 만나게 될 도÷람들에게, 수많윽 사람들에게 이것을 줄 수 밌 ㄷ4그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 자체가 되는 것. o'=우리의 첫 번째 과제였으며 운리의 이상을 실현f-수 있는 길밈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이때부터 우리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 것처럼 느껴습니다. '우리는 땅 위예서 몇 년이나더 살 수 있을까? f)년 혹은 :f)년?아니면 단지 몇달 혹은 며칠?' 우리는 이 기간을 우리 자신좌 뜻에 따라 살아갈 수도 있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짜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며 그 결과 비록 큰 죄는 짓지않을지라도 린년, 100년이 지나는 동안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그 대신 우리가 거룩한 뜻을 라라 살아가며 우리의 영혼이 이를 담는 섯작이 되도록 노력한다면차츰 차츰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 그라스포께서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실지

틀갔습니파. 그러나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깨달았기 배문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맡기는 것픈 격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 그리스포인들이곯녀운 앞에서 서글픈 어조로 '하느님의 뜻대로3'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체념하는 것은 이상하그 촐지 않은 듯 했습니다. 실상 하느님이 원하시= 대로 하느라고 서글프게 '체념'학 것이 아니라치려 우리의 무익한 뜻을 하느라고 하느님의 뜻!』버릴 때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한한 것을 위해, 하늘에 계?: 아버지께서 우4-가을 위해 생각해 놓으신 사랑의 계획윽 위4-조되었으므로 우리의 뜻대로만 할 때 우리는=-프--촌 느기게 죌 것입니다.

÷ 플초 하느님의 뜻을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달그플의 위대함이었습니다.

--4' 치음 얼마 동안 우리는 성인들처럼 성넉메그 그은 갈절한 소망으로 그들이 한 그패로플‥‥‥프걱 했습니다. 마피 어린 아이들이 어른의.~_-=- 톨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우리도 성인들에- 픈:․'':. 영긴적으초 여러 가지 고행을 배웠습‥‥‥=:)01'․) 익은 대로 맨 마루 바닥예서 자‥‥‥그 )1느플 하는 통의 것들이었습니다.=-~- -- 프피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_4 -÷_s 4 "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면 하루클근 - 츠근 글'S 7:다. 가시띠를 매야 한다면 밤낮으츠 --''S 플 7'i겟다. 쇠사슬로 몸을 때려야 한다면그헝4 ÷-Ci.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것일"'4': 차느넘케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우리는 뚜엇보다도 성인들이 언제나 하느닙의뜻을 했던 점을 본받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실지로 성인들은 각기 거룩한 뜻을 행함으로써 하느님의 걸작품이 될 수 있었으며 사랑이신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반영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이렇게 할 때 육신적, 영신적인 고행도 우리치영신생활에서 그 참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다음 호에 계속)

 

 

 

 

 

 

 

 

 

 

 

 

 

 

 

 

 

 

 

 

 

 

 

 

1997년 10,11월 그물 -일치의 영성


말씀



        이 운동의 초창기부터 볼 수 있었던 특징 중 하나는 “생활말씀”의 실천이었습니다. 첫 포콜라리나들 중 한 사람은 이전에도 성실하고 열렬한 태도로 진리를 추구하였고 그 당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실증 철학 안에서 그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경건하고 열심한 신자로 생활하는 한편 그는 이 연구를 계속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치열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순하나 위대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으니 이는 “예수님께서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구절구절에서, 한마디 한마디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방공호 속의 축축한 돌 위에 둘러 앉아 촛불을 밝히고 정답게 이 거룩한 책을 읽었고 그 말씀들은 우리 영혼의 눈에 특별히 빛나 보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음이 그처럼 고유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때처럼 복음이 우리 귀에 새롭게 들린적은 없었습니다. 복음은 하나의 거룩한 조각품처럼 완결하게 쓰인 책이었고, 우리 영혼에 “생활말씀”을 제공해 주었으니 이는 즉시 생활로 옮길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아무리 훌륭한 신심서적에서 읽을 수 있는 말들이라 할지라도 물로 희석된 것만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양서적, 철학 서적을 가득 채운 말들은 헛되이 사라져 버리는 말들 같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넓은 숨결을 지녀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친구들도, 백인이나 흑인도, 2세기 전의 사람들이나 이천 년대에 살 사람들도, 어머니나 국회의원도, 농부나 죄수도 어린이나 할아버지도, 누구든지 세상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모든 말씀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5, 20)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오 18, 2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마태오 5, 42)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 (요한 1, 9)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매일 사람이 되시는 것은 아니며 또한 우리가 어느 때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짧은 인생 중에,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하신 말씀을 잘 듣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유익하고 합당한 일임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를 깊이 확신하게 해 주셨고, 우리는 즉시 말씀을 실천해야 함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있을 순 없는 가정(假定)이긴 하지만 만일 땅 위의 모든 복음서가 없어진다면 사람들이 우리의 행위를 보고 다시 복음을 쓸 수 있을 만큼 열심히 살고자 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마태오 5, 7), ‘남을 비판하지 말라....’(루가 6, 37),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가 6, 27) 등의 모든 말씀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매주 우리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며 복음의 한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물처럼 마음속에 지녔으며 가능한 때마다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서로 계속 사랑하고 우리 자신처럼 형제들도 성덕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우리의 영신적인 부(富)까지도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했는지,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서로 이야기 했으며, 또한 기쁘고 놀랍게도 우리의 생활이 변화 될 수 있었던 사실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우리의 행위는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름없었으며, 우리의 사고방식은 예수님의 사고방식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 40)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안에서 그리고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 안에서도 사랑을 받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마음에 드는 사람’, ‘예쁜 사람’이나 ‘흉한 사람’, ‘귀찮은 사람’이나 ‘고마운 사람’,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 등 우리가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인간적인 생각들이 단 하나의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곧 모든 사람 안에서 단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랑해야 하며, 우리가 실지로 예수님께 해 드리고자 하는 그대로를 그들에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루가 10, 16) 이 구절은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의항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특히 성서분야에 있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주 생활말씀에 대한 짤막한 해설을 트렌토의 대주교님께 제출하여 검열해주시도록 부탁했습니다. 대주교님을 이를 고쳐주기도 하셨고 확인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생활은 복음을 ‘연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곧 한 배우가 다른 사람이 쓴 각본을 제삼자의 감독 아래 연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역을 루가, 마태오 등이 써 놓은 복음을 오늘날 어머니인 성교회의 인도 아래 ‘사는 것’ 이었습니나. 그리하여 오늘날 하느님께서 우리를 놓아주신 곳에 머물면서 점차적으로 또 하나의 다른 예수님처럼 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대죄 상태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은총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점차적으로 ‘재복음화’함으로써 예수님처럼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알파벳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90살이 되더라도 평생을 문맹으로 남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예수님을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 한 마디씩을 실천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이렇게 살면서 우리는 복음에 담긴 끝없는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신중한 단순함, 순결, 가난, 자비 등을 살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더 깊고 바르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모든 덕(德)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 때에는 깊은 뜻을 지니게 되고 그 본래의 가치를 지니게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생생한 체험이었으니 우리는 오랫동안 하느님의 말씀으로 양분을 취한 후,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오로지 ‘사랑’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똑같이 소중하여 그분의 유언만큼이나 커다란 가치를 지닌 것 같았습니다. 마치 하나의 거룩한 성체 안에 예수님께서 온전히 현존해 계시나 이 성체의 작은 조각에도 예수님께서 온전히 현존해 계시듯이 그분은 전체에 뿐만 아니라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도 현존해 계십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교회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교회는 구현화한 복음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이며, 여러 세기를 통하여 교회 안에는 많은 수도회들이 꽃피어났습니다. 각 수도회는 마치 예수님의 생활의 일면, 그분의 태도, 그분의 일생 중 한 사실, 그분의 고통, 또는 그분의 말씀 중 한 구절이 실현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은 단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 3)라고 세상을 향해 계속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도미니꼬회 회원들은 로고스 곧 말씀을 묵상하면서 진리를 설명하고 절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회 회원들은 순명을 강조합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그분의 ‘작은 길’을 따르는 이들은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르코 10, 15)라는 말씀이 영원히 울려 퍼지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베들레헴 수도회, 나자렛 수도회, 베타니아 수도회 등은 예수님의 일생 중 한 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상회는 예수님의 거룩한 상처를 생생이 되살려 주며, 성녀 가타리나는 그리스도의 피를,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을 예수 성심(聖心)을 기억시켜 주었습니다.

        수사들은 관상(觀相)을 활동에 합치시켰습니다.

        갈멜 회원들은 타볼산의 하느님을 흠숭하나 설교하기 위해 그리고 수난과 죽음을 맞기 위해 그곳으로부터 내려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 16, 15)라고 하신 말씀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수도회 자선 단체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흰 눈 속의 물은 작은 별처럼 결정을 이루고 있듯이 사랑도 예수님께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취하여 교회 안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 보이니, 이것이 곧 수도회들입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교회의 정원에는 모든 덕(德)이 피어났고 또 계속 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수도회의 창설자들은 한 가지의 특정한 덕을 인격화(人格化)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랑과 많은 고통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으로 변모되어 하늘에 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도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태오 24, 35)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기에 지역을 통하여 펼쳐 보이는 존엄하신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왜냐하던 이 모든 성인들의 영적 자녀들이 그들의 핏줄에 같은 피를 지니고 온 세상 하느님의 교회가 있는 곳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참으로 놀랍도록 다양하고 그토록 깊은 일치 안에서 더욱 아름답고 품위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로 빛날 것입니다.■

 

 

 

 

 

 

 

 

 

 

 

 

 

 

 

 

 

 

 

 

 

 

 


1997년 12월 그물 - 일치의 영성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



        그리스도교 정신이 한마디로 사랑과 고통의 신비이듯이 이 운동에 참으로 생명을 준 요소도 사랑과 고통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일반적으로 사랑은 고통을 초월하며 생명은 죽음을 이기듯 이 마리아 사업회 안에서도 그러합니다.


        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던 당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별들일까? 꽃들일까? 아니면 어린아이들이거나 천체 혹은 황혼일까? 우리는 사랑 곧 어머니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등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 안에 넣어 주신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한 형제가 되심으로써 형제간의 사랑을 초자연적 수준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더욱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는 고통으로 순화된 사랑으로서 인간의 마음이 지닌 항구하고 성스러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이 모든 사랑을 능가하는 커다란 사랑인 것 같았습니다. 이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떠나 하나의 새로운 가정을 꾸미게 할 만큼 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이 사랑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니,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성인전을 읽었으며, 그들 한분 한분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숙련가로서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그 사랑을 맛본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는 성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한 후 동료들에게 돌아와 천상의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으며, 그분의 얼굴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빛으로 환히 빛나곤 했습니다.

        보나벤뚜라 성인은 <거룩한 사랑의 격려>라는 책에서 하느님 사랑의 용광로 곧 그리스도의 성심에 다다르려면 그리스도의 상처를 통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자신의 영혼을 불과 피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표현했습니다. 성녀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 자체가 되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불이며 여러분은 불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분은 여러 가지 강한 표현을 써서 우리가 사랑으로 ‘불타기’ 위해서는 고통을 통해야 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분이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입으시오, 피에 젖으시오, 피에 잠기시오, 피에 빠지시오, 피에 취하시오.”

        각자 강한 개성을 가진 성인들은 서로 달랐으나, 모두가 한결같이 예수님 수난의 장엄한 길을 걸음으로써 사랑을 만났던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신부님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당하신 순간은 아마도 골고타 언덕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오 27, 46)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일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단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잘 살고자하는 큰 소망에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우리는 그 고통 속의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습니다.)’을  우리의 모범으로 선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버림받으신 예수님, 그분의 얼굴과 그분의 신비스러운 부르짖으심은 우리 생활의 모든 고통스러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어두움, 메마름, 실패감, 고독감, 우리의 인간성과 죄의 무거움 등 갖가지 영신적인 고통을 막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후 세 시에 맛보신 암흑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어두움을 온전히 능가할 만큼 짙은 것이 아니었던가요?

        예수님께서 맛보신 메마름은 그분이 영혼 안에서 신비적으로 아버지의 현존을 잃었다고 느끼실 만큼 엄청난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 순간처럼 승리자이신 예수님께서 패배자로 나타나 보이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께서는 가장 가혹한 고독을 맛보심으로써 값을 치르시고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가 다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게 해주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등에 짊어지셨고 거룩한 피뢰침처럼 하느님의 모든 심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고통이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그림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고통이 있을 때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 이 어려움이 지나가 버리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끌었으나 이제는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고통을 예수님께 바쳐 드렸으며, 크나큰 그분 고통의 바다에 우리의 작은 물방울을 합쳐 드릴 수 있음에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늘 등 계속해서 그 다음 순간의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 다하여 실천해 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했을 때 어두움, 실패감, 메마름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생활이 얼마나 거룩한 동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삶 속에서 공허함, 십자가, 고통은 한 통로일 뿐이며 역경 중에서도 인생의 가득함, 곧 부활, 빛, 희망을 맛보게 해 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우리 중 누군가는 어떤 경우에 이 메마름이 마음 깊이 새겨져, 마치 연옥을 앞당겨 겪는 것과 같은 영혼의 밤을 체험했으며, 이는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계속 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영혼은 더 이상 자기 앞에 계신 그의 정배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사업을 위해 특별한 사랑으로 이 영혼을 순화시키고 준비시키기 위해 그분의 고통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 표현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영혼에게 고통을 마칠 힘조차 남겨 주지 않으시고 다만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은 이 생활을 막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이 모든 것이 해당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하느님과 계속 일치하게 해 주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계속 사랑함으로써’ 이룬 일치에 작은 금이 갔을 때, ‘버림받으신 예수님’은 또한 이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애덕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 따라서 애덕과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 시작한 우리의 생활에 의미를 주었던 그분의 감미로운 현존을 체험했으며,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우리의 작은행위들을 감싸주셨고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듣게 하시고 빛나는 미래를 내다보게 해주셨던 그분의 빛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과 하나를 이루었을 때 가득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자만심이나 교만한 마음을 가졌을 때, 자기 의견이나 소유물에 조금이라도 집착했을 때, 사랑이 부족할 때에는 예수님의 현존과 그분의 빛과 그 가득한 기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혼란에 빠지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되었으며 그 때까지 해 온 모든 노력이 헛되어 보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룬 빛나는 일치 위에서 해가 저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오로지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함으로써만, 그분의 영혼을 뒤덮었던 암흑을 기억함으로써만, 모든 것을 일치는 않았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고통을 사랑으로 바쳐 드리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용기를 내어 우리 사이에 다시 일치를 이루기 위해, 비록 우리가 아니라 상대방이 잘못했더라도 우리가 먼저 용서를 청하곤 했습니다. 사실 복음은 서로 간에 사랑이 부족할 때에는 우리가 제단에 제물을 바치더라도 하느님께서 즐겨 받지 않으신다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고자 했을 때 우리의 작은 공동체 안에 해가 다시 빛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 우리 사이에 현존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어두움, 메마름, 실패감, 고독감, 우리의 인간성과 죄의 무거움 등 갖가지 영신적인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후 세 시에 맛보신 암흑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어두움을 온전히 능가할 만큼 짙은 것이 아니었던가요?

        예수님께서 맛보신 메마름은 그분이 영혼 안에서 신비적으로 아버지의 현존을 잃었다고 느끼실 만큼 엄청난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 순간처럼 승리자이신 예수님께서 패배자로 나타나 보이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분께서는 가장 가혹한 고독을 맛보심으로써 값을 치르시고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가 다시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게 해주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등에 짊어지셨고 거룩한 피뢰침처럼 하느님의 모든 심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고통이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그림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고통이 있을 때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 이 어려움이 지나가 버리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끌었으나 이제는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고통을 예수님께 바쳐 드렸으며, 크나큰 그분 고통의 바다에 우리의 작은 물방울을 합쳐 드릴 수 있음에 기뻤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늘 등 계속해서 그 다음 순간의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 다하여 실천해 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했을 때 어두움, 실패감, 메마름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생활이 얼마나 거룩한 동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삶 속에서 공허함, 십자가, 고통은 한 통로일 뿐이며 역경 중에서도 인생의 가득함, 곧 부활, 빛, 희망을 맛보게 해 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우리 중 누군가는 어떤 경우에 이 메마름이 마음 깊이 새겨져, 마치 연옥을 앞당겨 겪는 것과 같은 영혼의 밤을 체험했으며, 이는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계속 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 영혼은 더 이상 자기 앞에 계신 그의 정배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사업을 위해 특별한 사랑으로 이 영혼을 순화시키고 준비시키기 위해 그분의 고통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 표현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영혼에게 고통을 마칠 힘조차 남겨 주지 않으시고 다만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은 이 생활을 막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이 모든 것이 해당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하느님과 계속 일치하게 해 주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계속 사랑함으로써’ 이룬 일치에 작은 금이 갔을 때, ‘버림받으신 예수님’은 또한 이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애덕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 따라서 애덕과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 시작한 우리의 생활에 의미를 주었던 그분의 감미로운 현존을 체험했으며,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우리의 작은행위들을 감싸주셨고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듣게 하시고 빛나는 미래를 내다보게 해주셨던 그분의 빛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과 하나를 이루었을 때 가득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자만심이나 교만한 마음을 가졌을 때, 자기 의견이나 소유물에 조금이라도 집착했을 때, 사랑이 부족할 때에는 예수님의 현존과 그분의 빛과 그 가득한 기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우리의 영혼은 혼란에 빠지고 어둠 속을 헤매게 되었으며 그 때까지 해 온 모든 노력이 헛되어 보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룬 빛나는 일치 위에서 해가 저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오로지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함으로써만, 그분의 영혼을 뒤덮었던 암흑을 기억함으로써만, 모든 것을 일치는 않았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고통을 사랑으로 바쳐 드리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용기를 내어 우리 사이에 다시 일치를 이루기 위해, 비록 우리가 아니라 상대방이 잘못했더라도 우리가 먼저 용서를 청하곤 했습니다. 사실 복음은 서로 간에 사랑이 부족할 때에는 우리가 제단에 제물을 바치더라도 하느님께서 즐겨 받지 않으신다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고자 했을 때 우리의 작은 공동체 안에 해가 다시 빛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 우리 사이에 현존하셨던 것입니다.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 단지 우리 영혼에만 빛과 평화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택한 그분의 모습을 기억하게 해주는 모든 사람들, 즉 외로운 사람들, 방황하는 사람들, 고아들, 실망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멸시받는 사람들, 절망한 사람들, 모순된 환경 아래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빛과 평화를 주었습니다. 이 운동의 회원들을 즐겨 이들에게로 다가갔으며 이들 마음에 가득 찬 고뇌를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버림받으신 예수님에 대해 그분의 한없으신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그들이야말로 행복선언에서 말하는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들 자신과 인류의 선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나누어지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개인의 고통 안에서도 단지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모습만을 알아보고, 이 고통을 그분께 바쳐 드려야 함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 아기의 데레사 성녀는 그를 죽음에로 몰아넣은 병에 걸렸을 때 “정배가 오셨습니다.”하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렇게 우리와 우리 주위의 친구들은, 고통이란 늘 성스러운 것으로서 이를 단지 참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끌어안아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외로운 마음은 하느님으로서, 도한 이 운동에 속하는 많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채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버림받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 인생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고아들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자 온힘을 다해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형제, 자매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를 발견했습니다. 실망한 사람들, 지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어찌하여’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커다란 의문, ‘어찌하여’ 안에서 그 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그분께서는 더 이상 존재하시지 않는 것 같았고 버림받으신 순간에는 무(無)가 되신 것 같았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늘로부터 땅에까지 이어지는 거룩한 경사면(傾斜面)이 되시어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께로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땅 위의 ‘어느 누구든지’, 도덕적으로 영신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든지’,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분을 본받아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의 짐을 값진 사랑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케 차츰 차츰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통해서도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마르고 2, 17)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매일 아침 깨어나면서 “당신이 버림받으셨기에”라고 되풀이하곤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제게 오시더라도 저는 당신을 위해 삽니다. 당신과의 만남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순간이야말로 하루 중 제게 가장 귀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죄인들, 무신론자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등 마치 축성되지 않은 감실과 같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신비체의 지체들이거나 신비체를 향하여 있습니다.

        이 형제들 안에서도 우리는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계시는 버림받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사이에 이룬 일치를 통해 증거와 더불어 하느님의 은총으로 많은 회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사업들이 있습니다. 이는 신비롭게도 그들이 이룬 초자연적 부(富)가 하느님께서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신비체의 다른 부분에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도 있어 학교나 고아원, 병원 등을 짓기도 합니다.

        마리아 사업회가 하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가 접촉하는 가람들을 회개시키고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를 정화시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 이분께서 바로 우리의 이상(理想)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 밖에서, 우리의 위로와 격려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 그분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작은 체험을 통해 단지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찾아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실상 우리의 체험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코 8, 34)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수많은 실현 중의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모험을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곧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던진다고 해서 오로지 고통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의 위대한 형제들인 성인들과 같이 우리의 작은 체험을 통해 이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에로,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데려다 줍니다.■





‘오늘, 나는 단지 나의 정배이신
나의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기위해서 살겠다.’



        각 사람 위에 세우신 하느님의 계획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일생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전개해 나가고자 하는 원의를 하느님께 내어 맡기도록 각자가 노력한다면 이 땅은 머지않아 그 모습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좋은 결과에 목표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룹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우리는 분명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언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나요? 모든 것이 잘 되어가서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드릴 때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쉽고 아름답긴 하나 순간적인 열정의 결실일 수도 있고 혹은 개인적인 이해타산, 즉 그분께 대한 사랑이아니라 우리에 대한 사랑이 섞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역경 속에서도 그분을 사랑한다면, 흐리고 한층 더 나아가 우리가 참된 사랑을 지녔음을 보증하기 위하여 우리를 아프게 하는 모든 것 안에 계시는 그분을 더 좋아하기로 결심한다면, 이때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재난 속에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참되고 확실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일생을 통해 거룩한 모험을 하고자 한다면, 과거와 현재, 그리 미래의 우리 생애의 모든 것이 우리 위에 세워진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시키는 원료임을 확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선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십자가, 어떤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원해야 하는가요?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다라야 한다.” 자기 것!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의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실상 만일 그분께서 우리 일생의 적당한 순간에 사랑의 열정 속에서 우리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그분을 따르도록 -보통 얘기하듯- 그분과 혼인하도록 청하신다면,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막연하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바로 고통 속에서, 거북스러움 속에서, 질병 속에서, 유혹 속에서, 상황 안에서, 사람 안에서, 우리 각자에게 지워지는 의무 속에서 그분을 끌어안으며 “이것은 나의 십자가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정배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청하십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만의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을 형제의 것이 아니며 다른 모든 형제들의 것도 아닌 바로 자기의 것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여러 가지 개인적인 고통의 비극을 넘어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줄 안다면 이는 극히 경탄스러운 일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하게 될 것이며, 성인들이 그랬듯이 그분을 끌어안고 싶어질 것이며, 그분을 기다리고 오직 우리만의 것인 그 부활에 의해 변화되어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을 보고 싶어 하게 될 것이니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형제 안에 계신 예수님과는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간을 잃지 맙시다. 즉 우리 자신의 생활을 잠시 살펴본 후에 ‘아니오.’라고 답하고 싶지만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있는 모든 것에 그분의 도우심으로 ‘네’라고 답하겠다는 결심을 합시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모든 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며 때로 우리는 밀알과도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을 줄 앎으로써 이삭이 꽃피어 남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지와도 같을 것이니 잘려지도록 놓아둠으로써 일급의 결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매일 아침 마음속에 이러한 약속을 하며 일어납시다. “오늘, 나는 단지 나의 정배이신 나의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겠다.”라고 그러면 우리는 할 일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부활하신 분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사시게 될 것입니다.■

끼아라 루빅